예비역의 사정

 

민규는 첫눈 오는 날 눈사람을 보여줬던 걸 기억했다. 현은 담배를 빌리다가 입을 맞췄던 순간을 말했다. 민기는 관물함에 담겨 있던 CD를, 재훈은 애인과 헤어진 뒤 의지했던 선후임을 이야기했고, 길호는 활동복 반바지를 입었던 여름을, 태연은 소대 외박에서의 하룻밤을, 은영은 어떤 작별 인사를 들려줬다. 제각기 다른 해에 다른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던 이들은 물론 당연하게도 제각기 다른 남자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일곱 명의 예비역이 갖고 있는 군대에서의 기억.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래서 이야기한 적 없었지만 분명 그 시간 그곳에 자리했던 그와 그의 사정事情.

인터뷰: 편집부
사진: 박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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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의 사정

한번은 겨울에 내무실에서 자고 있는데, 누가 깨우는 거야. 일어나니까 후임이 첫눈 와서 눈사람 만들었다고 보여주더라고… 처음 후임이 온다고 했을 때 많이 기대했거든. 막상 왔는데 내가 좋아하게 생긴 외모와 성격인거야.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그 친구는 운동을 잘해서 몸도 단단하고 성격도 싹싹하니 귀여운 구석이 있고… 대신 행정 업무는 잘 못 했거든, 그래서 내가 일을 많이 도와줬어. 약간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할까. 맨날 행정업무를 같이 하다보니까 다른 선임들이 우리를 부부라고 놀렸거든. 근데 실제 사이도 좀 그랬던 거 같아. ‘어? 어라?’하는 순간들이 있었거든. 매점에 가면 꼭 내가 좋아하는 걸 챙겨서 사오고, 내 어깨에 손을 얹거나 포옹하면서 엉기고…. 나는 내가 게이인 걸 어려서부터 확실시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종로, 이태원을 드나들었거든. 그래도 나는 군대니까, 군대에선 그러면 안 되니까, 누군가 나에게 스킨쉽을 해도 밀쳐내는 경우가 많았어. 근데 이 후임하고는 워낙 늘 붙어있고 정도 쌓이고 하다보니까… 어느새 나도 ‘야, 뽀뽀해’하면 후임도 ‘왜 그러십니까’하면서 냉큼 뽀뽀를 하고, 장난으로 짓궂은 스킨쉽도 하고… 그러면서 잠결에 더듬기까지 하게 된 거 같아. 친한 선후임으로 낮에는 화사했는데 밤에는 끈적한 사이였던 거지. 전역 무렵에는 괜히 나도 모르게 남자친구 대하듯이 그 친구에게 삐져있었는데 어쩌면 그런 게 연애감정이랑 조금 비슷했던 게 아니었을까. 근무표 몰래 바꿔서 같이 근무하게 한다든지 하는 사심을 부리긴 했었거든. 아, 휴가 나가서 만난 적도 있었어, 신촌에서. 근데 사복 입은 모습이 너무 촌스러워서 실망스러운 거야. 군복이 너무 잘 어울리는 타입이었던 거지. 같이 밥 먹고 얘길 하는데 군대라는 상황을 제외하면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그런 순간에 이런 관계의 끝을 이미 예상했던 것 같아.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안부 정도 주고받아. 얘는 이미 결혼도 했고 외국 나가서 잘 살고 있어. 물론 그때 이야기를 하진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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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의 사정

부대에서 유독 동기들끼리 사이가 좋았어요. 다른 기수에 비해 수가 좀 많았던 것도 있고, 다들 성격이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중 한 동기가 유독 저에게 관심이 좀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주변에서 ‘쟤 혹시 게이 아니야?’라고 할 정도였어요. “내가 이 부대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라고 저한테 말하기도 하고…. 그 친구가 저랑 노래 취향이 비슷해서 자주 음악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가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CD는 항상 그 친구가 휴가를 다녀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제 관물함 안에 들어있곤 했어요. 근무 특성상 주간에 취침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다가 눈을 떠보면 제 손을 꼭 잡고 제 얼굴을 보고 있다든지, 손에 간식거리를 쥐어주고 간다든지, 관물함에 뭘 넣어놓는 다든지 하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상대로부터 그런 호의가 계속되다 보니 저도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아졌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저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어요. 이걸 들으면 뭔가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1, 2주간 그 친구를 피했는데, 종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에게 손목을 덥석 잡혔어요. 손목을 잡힌 채로 둘이서 서로 대화도 없이 그렇게 온 부대를 서너 바퀴 돌았어요. 저는 초조함이 극에 달해서 이제 근무시간이라고 둘러대고 손을 놓고 근무지로 올라갔는데 그 뒤로는 서먹서먹하게 돼버렸어요. 그때 저는 제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웠던 터라 얘까지 이래서 나까지 이상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컸던 거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자신도 없었고요, 뭐 지금에 와서는 그 친구가 내 스타일이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상상하기도 하지만. 또 기억에 남는 건 특기학교에서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밝힌 친구예요. 우연히 잡담 하다가 그 친구가 ‘나는 여자도 좋아하지만 남자도 좋아한다’고 해서 다들 “헐 대박”이랬는데, 그 친구가 자기표현을 많이 하고 긍정적인 스타일이었거든요.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나중에 그 친구가 저희 예하포대에 소속되었는데 직통전화로 이런저런 상담을 많이 했어요. 제가 이쪽이란 얘기는 못하고 늘 제삼자를 들어서 고민들을 털어 놨는데 “우리는 여자랑 사귀면 이러는데, 남자랑 사귀는 사람들도 그러냐”로 시작해서, “사람들이 만나는 커뮤니티 같은 것이 있냐” 등등 궁금한 걸 많이 물어봤어요. 제 내부의 혼란을 공유하기는 힘들었지만 그 친구에게 이쪽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던 거 같아요. 나중에 제가 게이임을 인정하는데 이 친구의 영향이 컸어요. 그 친구 통해 알게 된 커뮤니티가 이반시티였는데, 휴가 나갈 때 마다 눈팅만 하다가 전역하게 될 즈음에 용기를 내서 친구를 찾는다는 글을 올리고, 이쪽 친구를 처음 사귀게 됐거든요. 그 뒤로는 뭐 탄탄대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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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했던 사람과 위수지역 이탈하다가 걸려서 6일 영창을 갔거든 그래서 1년 10개월하고도 6일을 복무했어. 인사계원으로 군생활을 했는데 포반에 있던 두 달 선임을 좋아했어. 벌교출신이어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나이도 네 살 차이나 나는 형이었는데 ‘벌교에서 얼굴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가? 자대 들어오자마자 이 사람 얼굴만 눈에 확 띄었거든 그리고 사투리 페티시라고 해야 하나, 벌교 사투리가 목포보다도 심한데 그것도 괜히 더 좋고…. 다소 무식한 구석도 있었는데 늘 예의바르고 본인의 호기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혼자 좋아서 막 헌신적이다 싶을 정도로 맨날 졸졸 따라다니고, PX 갈 때나 담배 피러 갈 때나 샤워를 할 때나 항상 같이 했던 거 같아. 그러다가 한번은 단둘이 외박 나가서 서울을 다녀오자고 계획을 세웠어. 위수지역 이탈이야 워낙 다들 빈번하게 하는 거라 큰 무리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하필 우리가 탄 버스에 헌병이 타는 바람에…. 이 사람에게 내가 게이인 것을 밝히기도 했지만 그냥 브로맨스 정도였고 육체적인 접촉까지 가졌던 건 오히려 입대 동기였어. 논산훈련소를 같이 나왔는데 중간에 부사관 지원을 해서 우리 부대로 온 애가 있었거든. 어쩐지 큰 개 같은 느낌인데 왠지 모르게 색기가 흐르는 타입이었어. 군복 입었을 때 버클이랑 상의가 맞아 떨어지면서 주름 하나 잡히지 않는 게 너무 예뻤거든. 좋아하진 않았지만 한번 자보고 싶단 생각은 했는데 마침 설날에 간부들 병사들 다 같이 외박을 나가서 모텔에서 술을 마시게 됐어. 방을 두 개 잡았거든, 한방에 모여 술 마시고… 근데 이 친구가 술 마시다 말고 옆방에 가서 자겠다는 거야.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따라갔지. 그 당시 인기 있던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그 옆에 누워서 자연스럽게 팔베개를 벴어.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입을 맞췄던 거 같아. 근데 이 친구가 날 밀어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입맞춤에 응하면서 키스를 하는 거야. 술도 마셨겠다, 기회다 싶어서 내가 좀 더 리드했지. 그렇게 갈 때까지 갔는데 마지못해 하는 섹스가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섹스였어. 자고 일어나니까 그 친구는 없고 외박 나온 다른 병사들이 다 같이 자고 있더라고. 나는 커밍아웃을 워낙 아무렇지 않게 하는 편이라 군대 안에서는 동갑내기 선임에게 먼저 커밍아웃을 했거든. 엄청 친해서 믿었던 것도 있고 그 선임도 딱히 거부감이 없고, 워낙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휴가 다녀오면 ‘이번엔 누구랑 했냐’고 물어볼 정도였어. 나중에 전역할 때는 간부들 전체에게 커밍아웃을 했는데, 훈련병 중에 젠더퀴어 친구가 온 거야. 써놓은 걸 보니까 군대에 안 오는 게 맞는 친구인데… 행보관이랑 같이 상담하다가 행보관이 ‘저런 애는 어떻게 하냐?’고 나한테 묻는 거야. 그래서 그냥 주변에 이런 친구들이 많아서 아는데 잘 대해주고 터치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했거든. 그러다가 내가 직접 상담도 하게 되고… 근데 내가 잘 안다고 하니까 나도 ‘그런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그랬거든. 마침 전역할 무렵이라, 전역하는 날 나도 게이지만 군생활을 잘할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친구들이 오면 잘 대해달라고 커밍아웃을 했어.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 커밍아웃 엄청 많이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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