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힌트

 

편집부가 매거진 DUIRO 3호를 만들며 수집했던 고민을 당신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른 생명과 함께 사는 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글: 이도진
사진: 박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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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이란 무게를 외면하는 게 가능했던 이십 대, 그래서 서른이 되면 돈 생각이 더 많아진다. 돈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니까 초라한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초라한 감정이 책임감을 이겼던 적은 별로 없다. 내가 좀 추레하게 살아도 우리 애는 성분 좋은 사료를 먹여야지. 간식은 끊이지 않게 두어야지. 이맘때엔 병원에 꼭 가봐야 하는데. 부모님이 보면 어지간히 유난 떤다고 할 그런 생각들. 간장이와 겨자라는 이름의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나는 딱 여기까지다. 내 식솔까지만 챙기자. 하지만 유기견 보호소에 들어간 아이들을 위해 프로필 사진을 찍고, 길냥이를 위해 사료 그릇을 꾸준히 채우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지키고 보호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게워내는 사람들. 왜 그 사람들이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걸까.

DUIRO 3호의 주제를 ‘반려동물’로 결정했을 무렵 나는 한 가설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지 못한 때였다. 이 질문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성소수자들은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 외로움은 다수자와 같은 것일까?’, ‘반려동물이 그들의 외로움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외로움? 내가 보아왔던 모든 성소수자들은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형태 없이 몸을 감싸는 외로움에 크고 작은 떨림을 멈추지 못하던 사람들. 나는 불가항력적 외로움에 자신을 던져 버린 게이를 가끔씩 마주하곤 했다. 어쩌면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눈동자는 어쩜 그렇게 비슷한 걸까. 그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 작은 영토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패배자가 된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난제를 들여다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밀려오는 외로움은 마취제에 가깝다.

마이클 홉스는 한 칼럼에서 외로움을 ‘게이들의 새 전염병’이라 불렀다. 이 칼럼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가진 여러 가지 특성들을 교차시키며 핵심을 파고든다. 치명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다른 소수 집단의 경우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지역 사회에 살면 불안과 우울이 낮아진다. 본능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에겐 정반대 효과가 있다.” 다수자의 사회가 정한 ‘정상’이란 가치는 어린아이를 옥죄고, 결국 못된 청년으로 자라게 만든다. 못된 청년의 몸엔 가시가 가득하여 다른 이를 끌어안을 수가 없다. 심술궂음. 그 상처는 때론 진화를 거쳐 미적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그건 무척 드문 일이다. 얄팍한 감각과 근육으로 장식된 인스타그램 피드가 상처와 가시들을 꽤 잘 가려주니까.

그럼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조명이 잘 닿지 않는 바 구석에서 마티니 올리브나 희롱할 나이든 게이가 되고 싶은 이는 없다. 완벽하리만큼 매끈한 세계도 결국 주름이 접힌다는 사실은 모두가 본능적으로 안다. 이성애자와 다르게 살아왔다는 안도감이 30대에 접어들며 급속히 색을 잃어간다. 차안대로 쓸만한 결혼식도 부동산도 아이도 없는 지금,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면 디그니티는 무엇으로 부양해야 할까? 춤과 파티의 계절이 끝나면 우리의 깃발은 어디를 가리켜야 할까? 힌트를 줄 선배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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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내가 첫 번째로 떠올린 것은 한 강아지의 얼굴이었다. 여러 품종이 뒤섞인 털. 검고 흰 얼룩무늬가 앞발을 뒤덮고, 귀 한쪽 끝이 잘린, 담배빵이 있는 아이. 양배추를 좋아하던 이 아이가 암에 걸렸을 때 담담한 척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항암치료를 이겨내고 지금은 무척이나 건강해진 강아지는 함께 사는 두 인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임이 틀림없다. 한 강아지가 너희를 바꾸었다고, 그 사실을 일깨우며 격려할 때마다 그들이 지었던 애매한 미소를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 미소는 스스로의 문제조차 다른 생명에게 투영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상기시키고 만다.

간장이는 태어날 때부터 꼬리가 꺾여 있었다. 임신한 어미 고양이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하면 그렇단다. 거의 울지 않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간장이를 보면서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못된 마음이 들면 힘없이 꺾인 저 꼬리가 반듯했으면 좋겠다 싶어 살살 힘을 주어 펴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턱시도가 더 예쁜 모양이었으면, 눈동자는 더 특별한 초록색이었으면 하는 때도 있었다. 이게 다 내가 가진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3년이 걸렸다. ‘비정상’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그 시선과 동화되어 모든 대상을 재단했다. 깍둑깍둑하게 썰린 세상은 허무했다. 고양이의 특별한 꼬리 하나 참지 못했던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계절을 보내고 나서야 변하기 시작했다. 옷에 붙은 털을 뜯고, 똥오줌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귀가를 빨리해야 하는 것. 시간을 쪼개 여행을 떠나고, 파티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늦게까지 영화 보는 일을 전부 포기해야 하는 것. 이 수행 같은 일들로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는 아직 계산해내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이 장기적인 투자가 외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름 내내 박현성 사진가와 독자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지나치게 번거로운 이 기획을 강행한 이유는 아마도 작은 힌트를 얻기 위한 무의식의 발현이었으리라. 몇 달 동안의 주말을 오롯이 반납해야 했고, 기록적인 폭염에 다들 지쳐갈 때였다. 겨울이라는 아이와 함께 사는 봄 님이 적어준 짧은 편지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가 뭐라고 네 세상의 전부가 되었을까. 사랑하는 내 고양이. 네가 온 덕에 나는 먼 나라로 떠나진 못했지만, 너와 함께 이곳에 단단히 발을 딛고 살고 있지. 너의 다정함이 나의 가장 큰 위안. 너와 함께 눈뜨는 아침이 앞으로도 매일이길.”

다른 힌트를 또 찾아내기까지, 그때까지 DUIRO 3호가 당신을 조금이나마 위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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